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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애인에게 `실패할 권리`를! / 정중규씨 박사논문에서

"/" 2013. 2. 13. 21:33

장애인에게 '실패할 권리'를!

정중규 씨 박사논문에서 장애인 당사자운동 촉구..
한국교회, 대형 시설복지 중심에서 벗어나야

 

예수의 장애인관에 입각해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설복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장애인당사자운동에 대한 신학적 논거를 제시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정중규 씨가 대구대학교 재활과학과에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관과 교회의 장애인사업에 관한 인식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해 장애인 관리형 시설복지가 독립생활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중규 씨는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며,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인권복지위원이기도 하다. 한국장애인문인협회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하기도 한 문필가로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교회쇄신에 관련된 칼럼을 써왔다. 파워 트위터리안이기도 한 그는 부산에서 장애인운동을 하며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장애인 직업재활학 분야에 뛰어 들어 만학도의 길을 걷다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학위 취득을 축하드립니다. 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0년 전에 부산에서 장애인선교운동을 하면서 ‘부산가톨릭지체장애인복지회’를 만들기도 하고, 장애아동 교육기관인 ‘마리아특수아동조기교육원’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어요. 이 일을 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을 지켜볼 기회가 많았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창립할 때도 함께 했는데, 지금은 이런 시설들이 과연 장애인을 위한 것이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때 사제가 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지만, 장애인복지를 생각하면 늘 예수님과 현실복지 사이에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 정중규 씨는 오웅진 신부 등 이른바 치유의 대가들이 병자가 낫고 난 뒤에 하느님의 영광이나 자기의 치유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비판하며, 오히려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말하며 장애인 당사자의 내재적 힘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한상봉 기자

그러다 2000년에 ‘한일 자립장애인 세미나’에서 처음 IL(Independent Living)운동을 접하고 제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IL운동의 이념과 가치관이 예수님의 생각과 같다니 전율할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확신을 갖고 이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20년 동안 머릿속에서 삭혀온 것을 이번에 논문으로 쓰게 된 셈이죠.

 

장애인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 구약시대에 머물러..
정결법 때문에 장애인 사제 되지 못한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은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강했죠. 당시 부산교구에서 성소 문제로 상담을 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죠. 그때 어느 신부님이 레위기 등에서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고 ‘장애인은 혈통적으로 제사장 가문에 태어날지라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정결법을 예로 들며 “흠 있는 사람은 사제가 되지 못한다”고 거부의 뜻을 보이시기에 제가 말했죠. “지금이 구약시대입니까?” 이런 사제들의 생각 때문에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사제가 되어 장애인이 된 사람은 있어도 장애인인 채로 사제가 되기는 어려워요.

한국교회는 말로는 그리스도의 교회지만 전통은 아직도 구약시대죠. 여전히 장애인을 보는 시선과 관계 맺는 방식이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자선적 태도 역시 구약시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지배체제를 교란하기 위해 행동했던 분입니다. 기존 패러다임을 교란시키는 행동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인을 다가올 하느님나라에 가장 먼저 초대받을 자로 삼았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마더 데레사나 오웅진 신부, 오수영 신부 등의 장애인 시설복지는 당신들 입장에서는 최선이요 애덕이라고 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달라요.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야 예수를 따르려는 이들의 태도가 바뀝니다.

-결국 예수님이 장애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장애인 당사자운동, 독립생활운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과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장애인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불쑥 치유행위를 하신 게 아닙니다. 당사자의 치유요청을 받고서 행동하십니다. 장애인을 도울 때도 에티켓이 있습니다. 불쌍하다고 본인의사도 묻지 않고 훨체어를 그냥 밀어주면 안돼죠. 당사자가 원할 때 밀어줘야죠. 예수님은 늘 치유행위에 앞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봐서, 본인이 원하면 치유를 행하십니다. 치유대상자를 피동적 수혜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존중했다
치유행위는 장애인의 사회복귀 위한 것

이것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자기선택권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좋은 감투라도 본인이 싫으면 쓰지 않는 법이죠. 장애인들도 자신이 원하면 ‘실패할 권리’조차 있습니다. 가다가 쓰러져 상처를 입어도 자신이 책임질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웅진 신부 등 이른바 치유의 대가들은 병자가 낫고 난 뒤에 하느님의 영광이나 자기의 치유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장애인들은 죄인 중에 죄인이었고, 한센병 환자들도 마찬가지여서 그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었죠. 예수님은 이들에게 “네게도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링컨대통령이 ‘흑인들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듯이, 여기서 믿음이란 신령한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존중심을 갖고 일어설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치유’입니다. 결국 병자들은 신적 권능으로 치유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힘을 끌어냈기 때문에 치유된 것이죠. 그게 요즘 많이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입니다. 즉, 치유과정에서 장애인이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복지시설로 손꼽히는 꽃동네와 오순절 평화의 마을 (사진출처/꽃동네와 오순절 평화의 마을 홈페이지 갈무리)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치유된 병자에게 “네가 치유된 것을 사제에게 보여 확인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동사무소 가서 주민증 새로 발급받으라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의 시민권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사제가 병나음을 확인해주어야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었거든요. 이것이야말로 독립생활운동의 목적이지요.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최소한 사도행전 시절까지는 이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놓인 불구자가 동정을 구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베드로 사도는 병자들에게 돈 주고 옷 입히는 것 대신에 ‘믿음’을 준 것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힘이 네 안에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은 킹 목사와 링컨처럼 특별한 자극을 주는 이름이었던 거죠.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다양한 이들이 모여 있던 원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붕괴되고, 점차 중심이 로마로 옮겨지면서 주도권이 로마귀족들에게 넘겨졌습니다. 대형 복지시설들이 후원자들에게 휘둘리는 것과 비슷하죠. 바오로 사도조차 로마인들을 칭찬하고 나서는데, 이들이 돈을 많이 대주니 그렇게 된 거죠. 그게 문제입니다. 이로부터 복지가 자선으로 떨어진 것이죠.

2세기 이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주교들이 자선시설을 만들면서 장애인들은 ‘한 공동체 안의 형제가 아니라’ 다시 돌봄과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사람들은 자선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애덕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죠. 귀족들은 자선을 통해 내적 평화와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잃어버린 양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멀리 떼어서 수용해 놓고, 상류층이 대주는 돈으로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한국교회의 장애인복지 분야는 규모가 엄청 커졌지만, 장애인 당사자 입장이 아니라 공급자 입장에서 사업을 벌입니다.

 

장애인 당사자들의 권익 위한 운동에 나서는 성직자, 수도자 전혀 없어
..장애인들은 여전히 시혜 대상자로만 인식하는 게 문제

-장애인 문제를 다루는 교회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요?

교회 안에 뿌리박힌 영육이원론이 문제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영육일원론이었는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몸을 천시하는 영육이원론이 교회 안에서 일반화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죽어서 영혼이라도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믿는 게 문제죠. 예수님은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도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게 관심사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현세를 견디고 내세에서 축복받으리라는 희망에 매달립니다. 장애인들은 내세에서 보상받기 위해 현세에서 참고 견디라는 게 자선사업의 사상적 바탕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 거죠.

▲ 지난해 12월 3일 제20회 세계장애인의 날 행사 참가자들이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 및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민중의 소리)

-한국교회의 장애인복지사업에 문제가 있는 생각인가요?

1960년대에 버클리에서 시작된 IL운동이 한국에 보급되어 현재 한국에는 IL센터가 200여 군데 되는데, 여기서는 책임자들이 모두 중증장애인들이고, 직원들도 50퍼센트 이상이 장애인입니다. 교회가 진정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복지활동을 하려면 시설복지에서 벗어나 IL운동에 합류해야 합니다. 현재 가톨릭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는 시설은 대부분 지적 장애인 중심이며, 이들을 작업장에서 단순노동에 종사합니다. 교회가 지적 장애인들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관리가 편하다는 점도 있겠지요. 지체장애인들이나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몸은 불편해도 제 생각이 분명해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예수님이시라면, 사회복귀를 원하는 지체장애인들과 뇌성마비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이는 장애인들을 관리나 돌봄의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파트너를 봐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장애인 복지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들이 직접 나서는 시위현장 등에서 함께 동반하는 사제나 수도자들이 전혀 없다는 현실입니다. 이들은 장애인들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장애인들이 직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꽃동네 등 대형 복지시설...장애인 담보로 한 브로커 역할
..장애인은 속죄양이라서 도움 받아야 하는 존재 아니다

한편 장애인사업의 추세가 대규모 수용시설보다는 지역사회 친화적인 소규모시설로 가는 게 시대적 흐름인데, 한국 가톨릭교회의 장애인사업이 아직도 대규모 시설 위주라는 게 큰 문제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생활시설 규모를 보면 50명 미만의 소규모 생활시설이 전체의 74.0%를 차지하고, 500명 이상의 대규모 시설의 경우는 전체 생활시설에서 0.9%(4개소)에 지나지 않지만, 그 0.9%에 속하는 꽃동네, 오순절 평화의 마을 같은 대규모 시설이 가톨릭 장애인시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시설은 수용인원과 상관해서 정부의 지원을 좀 더 많이 얻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이들은 일종의 장애인을 담보로 한 브로커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면 학원에 갑니다. 이처럼 장애인들은 교회와 시설이 자신들의 모든 삶을 관리해 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돌려주고, 그들이 요청할 때 거들어주는 게 예수님이 생각하신 복지입니다. 이렇게 곁에서 거들어 주는 자가 ‘선의의 협력자’입니다. 장애인을 지배하지 않고 보조하는 자입니다.

예수님도 수난을 통해 상처 입은 장애인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활은 다른 몸을 얻는 게 아니라 상처 입은 그대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 장애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지녔지만 그 자체로 온전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장애인복지에 관심이 있는 어느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장애인들은 여러분이 겪을 고통을 대신 겪고 있는 속죄양이니, 고맙게 여기고 도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은 속죄양으로 살기 위해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장애를 지녔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동등한 인간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장애와 상관없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의 장애인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공동체 회복 위한 전략적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장애인복지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요?

<2011년 한국천주교사회복지편람>에 따르면,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1,148개 사회복지 시설 가운데 1990년대 이후 설립된 시설이 전체의 78.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정부에서 종교계 사회복지기관들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늘리고, 공공 사회복지기관을 지어 종교계에 위탁경영하는 정책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지가 장애인복지에서 노인복지 분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령화로 가는 것도 그 이유겠지만, 교회가 마치 황금어장을 찾듯이 사업성이나 국가예산의 추이를 쫒아 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나라운동에서 우선적으로 선택한 파트너요 연대의 대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 ‘신앙의 해’를 맞이해 교회쇄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 쇄신의 원천은 언제나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장애인 사랑은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계급적 선택이 아니라 부족한 자식에게 더 쏠리는 자비로운 모성애의 자연스런 끌림이요, 동시에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대단히 전략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교회의 장애인사업이 예수님의 향기를 온전히 드러내고, 세상구원을 위해 그분이 흘리신 피땀에 절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람됨과 사람의 하느님 됨을 절절히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넋이 꺾이고 기 꺾인 자를 가엾이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죽어가는 그들을 되살려주어 그들이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우선적 선택인 생명존중과 인간존중의 예수 그리스도 영성이 온전히 회복되고 실현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교회의 장애인사업이 장애인에게 참된 구원의 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順 伊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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