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복음 선포
110. 저는 오늘날 도전 가운데 몇 가지를 성찰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을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명백히 선포하지 않는 복음화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복음화 사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아니라면 복음화는 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의 관심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 섭리대로 가야할 길을 온전히 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쁘게 인내심을 갖고 끊임없이 전하는 것, 곧 복음화가 여러분에게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I.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111.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교회는 복음화를 일으키는 단위로서 계급조직이나 제도 이상의 무엇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뿌리를 둔 신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순례하는 백성으로, 그리고 복음화를 실현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표현되더라도 교회는 그 제도적 표현을 항상 초월합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궁극적 토대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도하신 데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이를 위한 하나의 백성
11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그분 자비의 작품입니다.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렇게 위대한 그분의 선물에 칭송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전히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들 당신께 이끄셔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변형시켜서 우리 삶으로 당신 사랑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화 활동을 통해 그분께 협력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활동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입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시노드를 성찰하면서 이점을 매우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첫 말씀, 참된 주도성, 참된 활동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우리 자신 그분의 거룩한 주도성에 들어감으로써만, 이 거룩한 주도성에 애원함으로써만,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도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총의 우선성의 원리야말로 우리가 복음화를 성찰할 때 항상 빛을 비추는 횃불입니다.
113. 하느님께서 행하셨고 교회가 기쁘게 선포하는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시대 모든 사람과 결합시키는 길을 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라 한 백성으로 함께 부르시기로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개별적으로 스스로, 혹은 자신 만의 노력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생활에는 수많은 인격적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인격적 관계는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고려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께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부르신 이 백성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배타적이며 선발된 그룹을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마태오 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백성 안에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 3,28)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숭고한 존경과 사랑을 갖고 당신 백성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114.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빚어진 위대한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 한 가운데서 그분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선포하고 가져다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종종 길을 잃습니다. 세상이 걷는 여정에는 종종 격려가 필요하고, 희망이 제시되어야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비를 아낌없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환영받는다는 것을, 사랑받는다는 것을, 용서받는다는 것을, 그리고 복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얼굴을 갖고 있는 한 백성
115.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의 백성들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각 백성은 그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문화의 개념은 유용합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 곧 그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 다른 피조물과, 하느님과 관계 맺는 특정한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문화는 백성의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각 백성은 그 역사의 여정에서 정당한 자율성을 갖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 본성에서 반드시 사회생활이 필요하며”, 사회 안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와 관련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문화 안에 있습니다. “본성과 문화는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은총은 문화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에서 구체화됩니다.
116. 2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신앙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꽃을 피웠으며, 그들 고유의 문화가 갖는 언어로 이 신앙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께서는 변형시키는 복음의 힘으로 그 문화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교가 단순하게 하나의 문화적 표현만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자기 본성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으면서, 복음 선포와 교회의 전통에 흔들림 없는 충실성을 갖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킨 민족과 문화가 갖는 다양한 얼굴들을 반영할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체험한 다양한 백성들 안에서, 그 나름 고유한 문화에 따라서, 교회는 그 참된 보편성을 드러내며 “그 다양한 얼굴들이 갖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복음화된 민족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 관습 속에서, 성령께서는 교회에 계시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교회에 새 얼굴을 줌으로써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십니다. 토착화를 통해 교회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문화와 함께 교회 고유의 공동체를 이끌어 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는 복음을 선포하고 이해하고 사는 방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와 형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가 갖는 가치들을 채택하고 “패물로 단장한 신부”(이사야 61,10 참조)가 됩니다.
117.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교회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복된 삼위일체의 완전한 친교에서 모든 것이 그 일치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조화와 친교를 구축하십니다.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유대인 것처럼, 성령께서는 바로 그 조화 자체이십니다.
은사의 풍성한 다양성을 가져온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획일성이 아니라 많은 측면을 가졌으면서도 조화를 꾀하는 일치를 창조하십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이 다양한 보물들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단일문화와 단조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면 육화의 논리를 우리는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문화가 복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시된 메시지가 그 문화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계시된 메시지는 문화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 혹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아무리 아름답고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 문화형식을 복음과 함께 부과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항상 어떤 문화적 외모를 갖지만,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자신의 문화를 불필요하게 숭배하게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참된 복음화의 열정보다는 환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118. 오세아니아의 주교들이 교회가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개발할 것을” 요청했으며, “교회의 신앙과 생활이 각 문화에 적합한 정당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선교사들이 원주민 그리스도인과 조화를 이루며 활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대륙의 민족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할 때, 유럽의 민족들이 특정 역사에서 발전시킨 표현 양태를 모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어떤 특정 문화의 표현과 이해의 테두리 안에 가둬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일 문화도 우리의 구속이라는 신비를 남김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119.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하는 힘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복음화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기름부음 덕분에 거룩합니다. 성령의 인도는 하느님 백성을 신앙고백에 있어서 오류가 없도록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록 하느님의 백성이 그 신앙을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더라도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로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여 구원에로 이끄십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일부로서,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 전체가 신앙 감각을 갖추도록 했는데, 이 신앙의 감각은 인류가 무엇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실재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인류가 그 실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인류가 그 거룩한 실재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120. 세례의 효력으로 모든 하느님 백성은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마태오 28:19 참조) 교회 안에서 그 지위가 무엇이든, 혹은 신앙에 있어 훈련 수준이 어느 정도이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복음화의 일꾼입니다. 전문가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나머지 신앙인들은 단순한 수동적 수령자가 되는 그런 복음화 계획을 그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의 인격적 개입을 요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실제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밖으로 나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데 많은 시간이나 오랜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그만큼 선교사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제자”이며 “선교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항상 “선교하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하지 못한다면, 첫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첫 사도들은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즉시 그분을 기쁘게 선포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선교사가 되었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요한 4,39) 말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곧바로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사도행전 9,20; 22,6-21 참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121. 물론 우리 모두가 복음화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훈련을 원하고, 복음을 더 또렷하게 증언하고 사랑하기 위한 더 나은 훈련을 원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복음화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복음화의 사명을 연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전달할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가까이 계신다는 것, 그분의 말씀, 그분의 힘을 우리에게 건네시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분이 없다면, 여러분의 삶이 변해버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여러분이 깨달은 것, 여러분을 도와 살게 한 것, 여러분에게 희망을 준 것,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명은 평범함에 빠져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시해야 할 신앙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바오로 성인처럼 말하게 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필리비 3,12-13)
민중의 경건함이 갖는 복음화 하는 힘
122. 같은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복음이 토착화된 여러 민족들이 바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집단주체이거나 집단일꾼입니다. 각 민족이 그 고유한 문화의 창조자이며 그 고유한 역사의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한 민족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역동적인 실재입니다. 각 세대는 나름의 존재론적 환경에 접근하는 일련의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니다. 다음세대는 그 고유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물려받은 문화를 다시 공식화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가 속한 문화의 아들이 되며 동시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단 복음이 어떤 민족 사이에 토착화되면, 그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민족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도 전달합니다. 따라서 복음화를 토착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물을 자신들의 재능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으로 번역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민족이 받아들인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훌륭한 표현과 함께 풍요롭게 합니다. 그래서 “한 민족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복음화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민중이 갖는 경건함이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 경건함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 선교활동을 참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그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123. 민중의 경건함은 일단 신앙을 받아들이면 신앙이 어떤 문화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며 끊임없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한 때 사람들이 낮게 보았던 이 민중의 경건함은 공의회 이후 수십 년간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는 이 분야에 관해서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6세는 민중의 경건함이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민중의 경건함은 사람들이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거의 영웅적 희생과 관대함을 갖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베네딕토 16세는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해 이야기하면서 민중의 경건함이 “가톨릭교회의 보물”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백성의 영혼을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124. 아파레시다 문헌은 성령께서 대중의 경건함에 부어주신 풍요로움을 무상의 주도성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민중의 경건함을 통해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사랑받는 이 대륙에서 주교들은 이 대중의 경건함을 “민중의 영성” 혹은 “백성의 신비주의”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기층문화에 육화된 영성입니다.” 그것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추론적인 설명보다는 상징의 방법으로 그 내용을 보다 잘 발견하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행동에 있어서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살아가는 정당한 방식입니다. 교회를 느끼는 방식이며 선교사가 갖는 태도입니다.” 그 자체로 선교사가 되게 하는 은총을, 스스로의 테두리에서 걸어 나와 순례의 길을 나서게 하는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자기 아이들과 더부어, 초대한 또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성전을 향해 여행하고 다른 형태의 대중의 경건함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음화 하고 있다는 몸짓이 됩니다.” 우리 자신 이 선교의 힘을 억누르거나 조절할 생각을 하지 맙시다!
125. 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심판하려하지 않고 사랑하려 합니다. 사랑으로 태어나 함께 자란 애정으로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함 안에 현존하는, 특히 그들의 가난 속에 있는 신학적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픈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들의 굳건한 신앙을 생각합니다. 그 어머니는 비록 신앙조목에 대해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로사리오에 매달리거나, 초라한 집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모든 희망을 걸거나,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부드러운 사랑의 눈으로 응시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행동을 두고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행동들은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께서 하신 활동으로 성장한 신학적 생명을 드러낸 것입니다.(로마 5,5)
126. 토착화한 복음의 결실인 대중의 경건함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복음화의 활동력입니다.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끝이 없는 토착화의 과정을 심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 활동력을 촉진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민중의 경건함을 드러낸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의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새 복음화를 모색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자
127. 오늘날 교회가 선교의 뜻 깊은 쇄신을 체험하려고 할 때, 일상의 책임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설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웃이건 완전히 낯선 사람이건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선교사가 어떤 가정을 방문했을 때 하는 대화 중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은 비공식적 설교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견하지 않은 때에 어떤 곳에서든, 거리에서, 도시의 광장에서, 노동을 하는 도중에, 여행 중에도 그런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128.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점잖게 행하는 이 설교에서 첫걸음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기쁨, 희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할 때, 혹은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많은 요구를 할 때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꺼낼 수 있습니다. 성경구절이나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항상 근본적인 메시지, 곧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건네주신 분의, 당신의 구원과 우정을 우리에게 주시고 살아계신 분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을 명심해야 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증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증언을 반드시 겸손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메시지는 풍부하고 심오해서 언제나 우리의 파악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메시지가 직접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증언과 몸짓을 통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그 특정 상황에서 인도하시는 방법으로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적절한 상황이 허용된다면, 이 형제적이며 선교적인 만남은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관심사와 관련된 짧은 기도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자기의 관심을 누가 듣고 이해하고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들의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9.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내용으로 여기고, 외워서 배운 고정된 형식으로만 전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 메시지의 소통은 기술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수많은 몸짓과 표지를 갖고 있는 하느님 백성은 복음 메시지 소통의 집단적 주체입니다. 만일 복음이 어떤 문화에서 구체화된다면, 그 메시지는 더 이상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인 그런 나라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복음 선포를 격려하면서, 특정 교회들은 더 적극적으로 토착화를 준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은 각 문화에 적합한 범주로 선포됩니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서는 복음이 그 특정 문화와 새로운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진행은 항상 더디며, 그 때문에 우리는 몹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용기를 꺾는다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편한 상태로 머물러 그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서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맡지 못할 것이고, 대신 교회가 활기를 잃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방관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화하는 친교에 봉사하는 은사
130. 성령께서는 복음화 하는 전체 교회를 다양한 은사로 풍요롭게 합니다. 성령의 이 선물들은 교회 쇄신과 교회 건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선물들은 보관하라고 작은 집단에 위임하고 안전하게 맡긴 일종의 유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교회의 몸에 통합되어, 중심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그리고 마침내 복음화하려는 추진력에 도달합니다. 어떤 은사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표지는 그 교회적 성격에 있습니다. 즉 그 은사의 진정성은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가져오신 새롭고 참된 어떤 것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선물이나 영성을 가리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보다 더 직접 겨냥하고 있는 은사라면, 은사의 행사는 그만큼 더 교회적일 것입니다. 은사가 진정하고 신비로운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비록 친교가 고통스러울 때조차,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이런 도전(친교)에 응답하는 가운데, 교회는 이 세상에서 평화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131. 사람 사이, 공동체 사이의 차이들은 가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원천이신 성령께서는 모든 것에서 좋은 것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좋은 것을 복음화에 유용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항상 성령의 도움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다양성, 복수성, 다중성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일치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다양성을 갈망할 때,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배타적이고 불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비슷하게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 계산에 기초해서 일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일률적 획일성을 강요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화, 사상, 교육
132. 다른 문화에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그것을 직업, 학문, 과학의 영역에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이성, 그리고 학문 사이의 조우를 의미합니다. 이 때 교회는 신뢰성, 즉 일종의 창의적인 호교론의 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논리와 접근법의 개발을 기대합니다. 이 창의적인 호교론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의 문을 많이 열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메시지 선포를 위해 이성과 과학의 일부 범주들을 채택할 때, 그 범주들은 복음화의 도구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채택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추고 쇄신하기 위한 성령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133. 복음 전파자가 각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혹은 복음이 전체 문화에 선포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목 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이나 인간 경험과 대화하는 신학은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른 문화적 배경과 그룹에 가장 잘 전할 수 있는지를 식별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화에 헌신하는 교회는 학문과 문화, 세상과 대화를 나누려는 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그 은사를 높이 평가하며 격려합니다. 저는 신학자들이 그 봉사를 교회의 구원 사명의 하나로 수행해주시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할 때, 교회와 신학은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탁상공론의 신학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34. 대학은 학문간 교류하고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 복음화 헌신을 정교하게 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탁월한 환경이 됩니다. 언제나 교육 활동과 복음의 분명한 선포를 결합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톨릭 학교는 문화의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어 적합한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창의성을 가져야 할 그런 나라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