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열린 마음을 지닌 어머니
46. “길을 나서는” 교회는 그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교회입니다. 변방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여기저기 달리는 것을 멈추고 길 위에서 비틀거리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의 열망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때로 우리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는 아들이 돌아올 때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놓습니다.
47. 교회는 그 문이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개방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는 우리 교회의 문들이 항상 열려 있어서 성령의 인도로 누군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왔을 때 그가 문이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닫혀 있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교회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성사의 문이 사소한 이유로 닫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 자체로 “문”인 세례 성사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성체성사가 성사생활의 완성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사람을 위한 상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위한 강력한 약이며 영양제입니다. 이런 신념은 우리가 뭐든지 과감함과 신중함으로 고려하라는 사목적 결론을 낳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은총의 촉진자라기보다는 은총의 심판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요금 징수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며, 그곳에서 나름대로 문제를 갖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곳입니다.
48. 만일 전체 교회가 이런 선교의 열망을 취한다면, 교회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가야합니까? 복음을 읽어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부유한 이웃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아픈 이들, 일상적으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루카 14:14)입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메시지의 선명함을 약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항상 “가난한 사람은 복음의 우선적 수취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 오신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완곡하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제발 그들을 버리지 마세요.
49. 길을 나섭시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건네기 위해 나갑시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에게 자주 한 말을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온 교회에 말씀드립니다.
저는 갇혀있으면서 자기만의 안전에 몰두하는 건강하지 못한 그런 교회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입고 멍들고 먼지 묻은 교회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리에서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가 스스로 중심이 되려고 애쓰다가 결국 강박관념과 절차의 그물에 걸려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얻는 힘과 빛과 위로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신앙 공동체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 인생에서 목표와 의미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저의 희망은 재가 되어버릴 두려움이 아닙니다. 거짓 안전감을 주는 구조들 안에, 우리를 무자비한 심판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두려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주하는 사이에도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문 앞에 서 있고, 예수님께서는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말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두려움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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