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스크랩] [2월1일]

"/" 2013. 2. 1. 08:18

레지날드(Reginald)   [2월1일]
연 도 : 1183-1220년
신 분 : 복자,수사

레지날드는 설립자이신 성 도미니코(Dominicus)로부터 수도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그의 소원대로 도미니코회의 수도복을 직접 전해주었다고 전해온다. 프랑스 아를(Arles)에서 멀지 않은 랑그도크(Languedoc)의 생 질스(Saint-Gilles)에서 태어난 그는 1206년부터 5년간 파리 대학교에서 법률을 가르쳤고, 1212년에는 오를레앙의 성 에그난 대학장이 되었다. 1218년에 로마(Rome)를 순례하던 중에 성 도미니코를 만났는데, 중병을 앓던 중에 성모님의 발현을 보고 자신의 영적 진로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파리(Paris)와 볼로냐(Bologna)의 대학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파리에서 선종하였고, 노트르담 데 샹프에 안장되었다.

바오로(Paul)   [2월1일]
연 도 : +405년
신 분 : 성인,주교

프랑스 랭스(Reims)에서 태어난 성 바오로(Paulus)는 이교도의 침입을 피한 후 아를(Arles) 부근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후에 그는 도피네(Dauphine) 지방 트루아 샤토(오늘날에는 폐지된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베리디아나(Veridiana)   [2월1일]
연 도 : +1242년
신 분 : 성녀,동정녀,은수자

비리디아나(Viridiana)로도 불리는 성녀 베리디아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카스텔피오렌티노(Castelfiorentino) 태생의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집안이 몰락하여 12세 때에 친척집의 하녀로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성덕은 크게 돋보였다. 그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한 뒤에는 고향 마을에서 아예 은수자로서 살았다.

주민들은 엘사 강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성당 곁에 작은 기도소가 딸린 움막을 지어 주었는데, 그녀는 이 조그마한 움막에서 34년을 기도와 고행 속에서 살았다. 그녀가 외부 세계와 통하는 길은 그 움막에 딸린 조그마한 창문이었다. 그녀는 주로 빵과 물 그리고 가끔씩 채소를 먹었다. 잠은 맨땅에서 잤다. 한 번은 뱀 두 마리가 그녀의 움막으로 들어왔으나, 그녀가 내쫓지 않자 1년 동안 함께 살다가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녀는 1221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방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이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발롬브로사 회원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브리지다(Brigid)   [2월1일]
연 도 : 450-525년
신 분 : 성녀,수녀,설립자

아일랜드 루트의 던달크 근교인 포가르트에서 태어난 성녀 브리지다(Brigida)의 양친은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으며 아주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의 부친은 덥타크로 레인스터의 아일랜드계 두목이었고, 그녀의 모친 브로카는 그의 궁중 시녀였다고 한다.

그러나 브리지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수도생활에 큰 흥미를 느꼈고, 성 마카일로부터 크로그한에서 수도복을 받았고, 아르그마의 성 멜에 의하여 서약을 발하였다. 그녀는 얼마동안 크로그한 언덕 밑에서 7명의 동정녀들과 정착한 바가 있으나, 468년경에 멜을 따라 미스(Meath)로 갔다. 470년경에 그녀는 킬-다라(킬다르)에 두 수도원을 세웠고, 아일랜드의 첫 번째 수녀원인 이곳의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고, 킬다르의 주요 도시로 발전하게 하였다. 그녀는 킬다르에 예술학교를 세웠으며, 킬다르의 책으로 알려진 유명한 원고들을 남겼다.

브리지다는 당대의 가장 유력한 여성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겔의 마리아라고도 부르는 브리지다는 성 콜룸바(Columba)와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함께 다운패트릭에 묻혔으며, 그들과 함께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다. 브리지다는 브리드(Bride) 혹은 브리젯(Bridget)으로도 표기한다.


세베로(Severus)   [2월1일]
연 도 : +348년
신 분 : 성인,주교

성 세베루스(또는 세베로)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가난한 직공이었으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교구를 다스리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부르시는 특별한 방식으로 연관이 하나도 없을 법한 곳에 당신의 손을 뻗치셨다.

283년 라벤나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고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려 사람들이 대성당에 모였을 때, 세베루스는 자신의 부인 빈첸시아(Vincentia)에게 신부님을 방문하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다. 부인은 귀족들과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좋지 않기에 집에 머물기를 권유했다. “내가 가는 데 있어서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묻자 부인은 “구경하러 어슬렁거리는 것보다 여기에 할 일들이 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계속 가려고 하자 “가세요. 오실 때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세요” 하고나서 “가서 주교로 선출되세요"라고 빈정대며 덧붙였다.

부인의 날카로운 대답에 익숙해져 있던 성 세베루스는 집에서 나와 사람들이 몰려드는 성당으로 가서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낀 자신의 작업복을 부끄러워하며 뒤에 서 있었다. 예식이 시작되고 성령을 청하자 성전 안에 흰색 비둘기가 나타나 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성당 안을 날아다니던 그 비둘기는 가난한 직공의 귓가에서 퍼덕였다. 그는 비둘기를 쫓았으나 다시 돌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를 향해 쏠렸고 회중은 이것을 그를 주교로 삼으신 하늘의 표징으로 보았다.

그때 성 세베루스의 부인은 집에 있었는데, 이웃이 달려와 그 소식을 전하자 웃으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직조기의 북을 던지는 이가 고위 성직자가 되다니요?”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군중이 집 주위로 모여들자 사실인 것을 알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성 세베루스는 라벤나의 주교가 되어 탁월한 성품으로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착한 주교로서 지내다가 죽을 때가 되자 신자들과 함게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고 그들을 축복하여 파견하였다. 모든 이가 떠나고 복사 하나가 남자 그는 복사에게 문을 닫도록 하고 주교복을 입은 다음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과 딸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복사의 도움을 받아 돌을 들어 올린 후 무덤에 내려가 누운 뒤 기도를 하고 눈을 감았다. 성 세베루스는 죽은 바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교회 미술에서 성 세베루스는 주교 복장을 하고 베 짜는 북을 든 형상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는 장갑과 모자를 만드는 이들 그리고 베 짜는 이들의 수호성인이다.

안토니오(Anthony)   [2월1일]
연 도 : +1267년
신 분 : 복자.순례자

안토니우스 만조니(Antonius Manzoni, 또는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잃었던 그는 막대한 유산을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희사하여 친척들과 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제 자신이 가난하게 된 그는 순례자의 복장을 하고는 파도바를 떠나 방황하다가 볼로냐(Bologna) 교외 바자노까지 왔다. 그는 여기서 병든 노사제를 발견하고 3년 동안이나 보살펴드렸다. 그들은 안토니우스가 문전걸식으로 얻어오는 음식으로 연명했으며,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다른 이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스스로 규율을 정하여 지켰으며, 꺼칠꺼칠한 옷을 입고 돌베개를 이용하여 맨땅에서 잠을 잤다.

그 후 그는 로마(Rome), 로레토(Loreto),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쾰른(Koln)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순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성벽 외곽에 있는 폐허가 된 어느 성당에서 지내던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종하였다.

지그베르트 3세(Sigebert III)   [2월1일]
연 도 : +656년
신 분 : 성인,왕

프랑스 왕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는 한동안 숨은 생활을 한 끝에 주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성 지그베르트이다. 이 때문에 그는 하느님께 개종하였다. 그는 거룩한 주교 성 아만두스(Amandus)를 불러 아들에게 세례를 주게 하였다. 이 젊은 왕자는 랑당의 피핀에게 맡겨졌고, 638년 다고베르트가 서거했을 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의 구제사업과 수도원 건설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모두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재위 25년 만에 서거하였다.

피오니오(Pionius)   [2월1일]
연 도 : +250/251년
신 분 : 성인,신부,순교자

성 피오니우스(또는 피오니오)는 박식하고 웅변이 뛰어난 사제였다. 그는 여행을 즐기는 좋은 성품을 지녔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스미르나(Smyrna)의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의 기념일을 마친 후 사비누스(Sabinus)와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 등 15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때 성 피오니우스는 군중들에게 이를 거절하는 이유를 웅변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는 재치와 박식한 비유 등을 동원하여 관중들로 하여금 흥분케 하였으나, 관중들이 그에게 압도되어 소란은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화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헨리코 모스(Henry Morse)   [2월1일]
연 도 : 1595-1645년
신 분 : 성인,순교자

성 헨리쿠스 모스(Henricus Morse, 또는 헨리코 모스)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어느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랐으나,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중에 가톨릭 신자가 될 결심을 굳히고 프랑스 두에(Douai)로 가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즉시 신학공부를 하여 1623년에 로마(Rome)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뉴캐슬(Newcastle)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회 신부인 존 로빈슨(John Robinson)과 함께 체포되어 요크(York) 성에 투옥되었다. 그는 로마를 떠나기에 앞서 예수회 총장으로부터 영국의 예수회 입회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요크의 옥중에서 존 로빈슨 신부로부터 수련을 받고 1625년에 유기서원을 발하였다.

3년간의 감옥 생활 후 추방되었을 때 그는 플랑드르(Flandre)로 가서 스페인의 필리푸스 4세 왕을 섬기는 영국 군인들을 사목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1633년 그는 재차 영국으로 왔는데, 이때 그는 쿠트베르투스 클랙스턴(Cuthbertus Claxton)이란 가명을 가지고 런던에서 활동하였다. 마침 런던에 페스트가 대유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었으나, 그 자신도 세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 후 그가 건강을 회복하였을 때 체포되어 타이번(Tyburn)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출처 : 일어나 아버지께
글쓴이 : 안개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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