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노래

“NLL 선거 이용이 문제인데, 왜 포기 논란에 매달리나”

"/" 2013. 8. 5. 13:15

“NLL 선거 이용이 문제인데, 왜 포기 논란에 매달리나”

등록 : 2013.08.02 20:19 수정 : 2013.08.03 07:17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맞서 목소리를 내왔던 원로 사제 정규완 신부가 1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는 공동체 선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도 박근혜 대통령이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며 박 대통령의 맹성을 촉구하고 있다. 최성욱 다큐 감독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 정규완 신부

꼭 딸깍발이 선비 같았다. 1일 오후 전남 순천 아파트에 들어서자, 원로 사제가 반갑게 맞았다. 백발에 동안인 정규완(74) 신부. 거실엔 책 더미가 빼곡했다. 환경·철학·신학·경제·미래학 등 다양했다.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까, 책을 더는 안 사야 하는데…. 그런데 안 고쳐져. 술·담배 안 하니까 책 살 돈이 좀 생겨.” 노신부는 효소를 따른 컵에 손수 물을 따라 권했다. “포도도 먹어봐. 달아.” 탁자 위 벽에는 노란 프리지어 꽃에서 은은한 향이 풍겨 나왔다.

“조용히 지내. 아파트 단지가 서민들에게 아주 편리한 곳이에요. 산 밑에 있어서 좋고. ‘향심기도’라고 미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미국에서는 관상기도라고 해요. 침묵 속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80년대 중반 시작했고. 1999년 한국에 들어왔어요. 하루 30분에서 1시간 정도 두차례씩 침묵의 기도를 해요. 승용차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어요. 향심기도 하러 광주 등지로 다녀오지요.”

25평 아파트 거실의 식탁 옆 벽에는 밑줄 그어가며 읽은 신문 기사들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역사의 고비마다 천주교 사제들이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번에도 사제들이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불법 개입에 성명을 냈는데, 동참한 이유는 뭔가요?

“내가 유신 때 신부가 돼 초창기부터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활동했어요. 하지만 신부나 신자들은 기도가 중심이라고 봐요. 하느님께 깊이 침묵 속에 머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침묵기도 하면서 심도있는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제들이 어떤 상황을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봐요. 충분히 앞뒤를 가리고 표현해야지요. 사제가 (어떤 문제에 대해) 진실을 확인했더라도 먼저 앞장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는 것이에요. 우리는 최종적으로 반대편 사람들까지도 안아야 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파악하고 있고, 또 진실의 은폐로 공동선에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 있을 때는 침묵을 해서는 안 되지. 공동선이 파멸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침묵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제.”

국정원이 선거 개입했는데
도움 안 받았다는 대통령
그건 할 말이 아니지
진실 은폐는 역사에도 죄다

4대강 혈맥 짓밟은 이명박
죄송하지만 대통령으로 안봤어
보 이미 만든거니까 놔두자?
강 밑 신음하는 생명을 봐라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은 사제가 침묵을 깨뜨릴 만한 사안이라고 보는가요?

“5·16 뒤 중앙정보부에서 신학대학생들도 견학을 시켰어요. 겹쳐진 편지도 찢지 않고 쫙 펼쳐서 볼 수 있는 기계를 보고 놀랐제. 정보부가 어머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뒤로 얼마나 기막힌 장치가 들어왔겄어. 안기부로 갔다가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번 경우 같은 것은 내용이 어떤 정도인가를 떠나서 (국정원이 대선에) 관여했다는 사실만 갖고도 어마어마한 사건이거든.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는 공동체 선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지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나는 뭔 도움받은 것도 없다’고 그러잖아? 그것은 대통령으로서 할 말이 아니지요. 해서는 안 될 비밀문서를 폭로를 했으면, (관련자를) 인사 조처를 취하고 그 사람을 당장 고발해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그런데 ‘나는 모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겠느냐 말이여? 그렇게 (침묵)하면 우리는 ‘그러면 대통령이 아니구마’라고 말할 수 있어.”

정 신부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인자해 보이던 얼굴에 추상같은 기개가 느껴졌다. 정 신부는 “상식을 어그러뜨리는 대통령이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불행한 거야”라면서 오른손으로 식탁을 탁, 탁, 탁 두드렸다. “이런 말 하면, 대선 결과를 무효화하려는 흐름과 같은 것 아니냐고 그럴 것이여. 그런데 우리는 대선 무효화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순수한 서민으로서 하는 이야기여…. 그런 문제를 외면하려면, 왜 대통령으로 앉아 있어? 잘못 들으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야. (침묵하려면) 차라리 순수한 자연인으로 있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여. ‘정치라는 것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대통령이 됐는데, 자연인으로 돌아갈 테니 여러분이 알아서 조처해주세요’ 이랬으면 좋겠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으로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의 진실을 덮으려는 것에 대해, 정 신부는 쉽고 또렷한 어조로 죽비를 내리쳤다.

-박근혜 정부가 이 상황을 알고도 이용했다면 어떤가요?

“대통령이 (진실을) 몰랐어도, 알았어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시민들 중 ‘배부른 돼지 꼴로 살고 싶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오.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시민들의 민도가 높아졌는데, 왜 못 알아듣느냐, 그 말이여. 그러면 자격이 없는 거지. 지난 대선 직후 라디오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라는 노래를 들었어. 노예 생활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부른 노래잖아?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지.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독재자 박정희씨의 딸로서 반드시 묻혀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요. 박근혜 후보가 선거 때 통합과 신뢰, 탕평 이야기를 했으니 한번 믿어보자고 했지.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 처참한 판국이 돼버렸어요. 우리 서민들은 누가 건들지만 않으면 알아서 자리를 찾아 살아가요. 그러나 (진실 은폐는) 국가 전체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

-엉킨 정국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국정원 문제를 국정조사 가지고 되겠어요? 문제가 시작된 데를 찾아야지. 엔엘엘 이야기를 엉뚱하게 들고나온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러면 거기부터 따지고 들어가자는 것이지. 시작된 시점부터 논란의 근원을 따져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중간부터 이야기하니까 엉켜버린 거야. 실타래의 끄트머리를 찾아야지, 헝클어진 것 갖고 이야기하니까 절대 해결이 안 되지. 민주당이 역할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을 너무 정직하게 하려다가 어려워진 측면이 있어요. 잘하려다가 실마리를 헝클어뜨린 사람한테 말려들어버린 것이지. 민주당이 한가지를 붙들고 늘어져야 해. 왜 엔엘엘을 들고나왔느냐부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엔엘엘 이야기를 해서 왜 저런 말이 나올까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논란이) 이어지더라고. 잘못은 엔엘엘을 이용했던 국정원에 있잖아. 그것으로 족해. (노무현 대통령이) 포기했다는 말을 분명히 찾아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그것이 왜곡의 진수야. (양 정상의) 최종 합의서에 아무 말도 없는데, 왜 중간 것 가지고 따지냔 말이야. 설사 중간에 포기 발언 했다고 한들 최종 안 한 것으로 했으면, 그걸로 끝인 거지. (새누리당과 정부의) 장난에 말려든 거지.”

1967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보좌신부로 출발한 그는 77년 7월 광주 북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함평 고구마 사건’(76~78년)을 만났다. 농협이 7300여 농가에 전년보다 인상된 값으로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 불씨가 돼 발생했다.

-그때 농민들이 북동성당에서 농성을 오래 했지요?

“농협에서 고구마를 수매하기로 돼 있었는데, 수매를 안 해 썩어버린 모양이여. 함평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던 서경원씨 등이 주도했제. 농민들이 농민대회를 하고 싶어하는데 장소를 제공해준 것이지. 만장에 글씨 써서 성당 앞에 죽 걸어놨거든. 중앙정보부 시절이니까 정보원들이 성당 앞에서 진을 치고 있고 신자들 주일미사 다니는 것도 밖에서 검열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리실에서 가마니 깔고 단식을 하는데, ‘한밤중에 덮쳐서 깨불자’ 이런 말도 들리더란 말이여. 캄캄해지자 내가 성당으로 들어가자고 했어. 성당을 덮치다가 잡혔다는 이야기 들어야 할 것 아니여? 소설가 황석영씨도 같이 농민들과 누워 있더라고.”

-80년 5·18 민주화운동 땐 고초를 당하셨지요?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전남도청에 들어가고, 남동성당으로 오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뭔 일 했겠어? 젊은이들은 우리 말 들어줄라고 하간디? 군인들도 자기 말만 하고. 말이 수습이지 난감한 판국이었지. 그러다가 80년 5월27일 새벽 급습을 당한 것이지. 김성용 신부님 등이 탱크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행진을 했지요. 나는 참여를 못 했어. 그러고 나서 힘 풀린 상태에 있는데, 6월 초순께나 됐나? 토요일에 저녁 미사 하려는데 연행돼버렸어. 31사단 영창에서 조비오 신부님이랑 한동안 같이 지내고. 돌아가신 홍남순 변호사도 거기에 계시고. 좋은 체험이었제. 그곳에 있어본 것도 경험이거든.”

-시민들이 무력하게 죽는 모습에 절망감도 느끼셨을 텐데요.

“그때 우리 성당에 광주일고 다니던 학생이 하나 있었어. 한쪽 팔에 장애가 있던 아이가 그 불편한 몸으로 상무관(옛 전남도청 앞 시민 주검 임시보관소)에 있었어. 그때 관이 부족하니까 널려진 시체도 있었는데 거기서 보초를 서다가 결국 죽었지. 지금 광주 5·18묘지에 누워 있어. 현장에서 그들과 같이하지 못했다는 그런 마음에, 시민들이 묻힌 옛 망월묘지를 갈 수 없었어요. 접근하는 순간부터 콧물, 눈물이 나면서 통곡이 나오니까. 자격지심도 있는 것이지. ‘나 같은 사람이 죽었어야 하는데, 왜 살아 있느냐’ 하는 자책감…. 그래서 그곳을 못 갔어. 가면 눈물이 나니까.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이 생긴 뒤) 새 묘지 생기고 조금 마음이 안정이 되더라고.”

원불교·불교·천주교·개신교 등 광주지역 4대 종단 종교인들이 1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와이엠시에이(YMCA) 무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광주/뉴시스

이후에도 침묵하지 않는 사제의 길을 담담하게 걸어왔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겸손을 온몸으로 살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도 침묵을 수련하라고 권해온 정 신부는 불의에는 강론으로, 또 서명으로 맞섰다.

2009년엔 용산참사를 일갈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광주에서 연 기도회 강론에서 “현 정권은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을 희생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등 국민의 저항을 공포정치로 다스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0년엔 4대강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그해 12월 한국 가톨릭 최고지도자인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단이 4대강 개발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발언을 ‘궤변’으로 질타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에 동참한 원로 사제 25명 가운데 일원이었다.

-요즘 4대강 문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처음부터 4대강 사업에 반대했어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난 엠비(MB)를 대통령으로 안 본 사람이여. 왜냐? 용산 사건이 생겨서 경찰·서민들이 그렇게 죽었는데도, 대통령이 한마디도 유감 표명을 안 했어요. 이게 뭔 일이냐고? 대통령이 놀라야 하는 것 아니여. 4대강에는 엄청나게 몰두하면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이지요. 강을 그렇게 쉽게 손을 못 대게 돼 있잖아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이 엄청나게 섬세한 법이더마. 조그만 강을 손을 대기도 힘든데, 4대강 혈맥을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가 있어요? 역적입니다. 이완용 역적이라고 하지만 이명박은 현시대 국민의 역적입니다. 대통령 권한을 앞세워서 4대강을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고, 못된 짓거리는 다 하고. 국정원 사건도 그때 이어진 것이라고 봐야잖아요? 당시 여수에서 5·18 이야기를 해달라고 강론을 요청받았는데 5·18은 조금만 하고 4대강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 정권 끝나면 줄줄이 쇠고랑 차는 사람 생길 것이다’라고 그랬어요.”

-4대강 문제 해법을 두고 여러 의견이 나오는데요.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4대강 문제에 고발도 하고 그랬는데도 법원에서 분명히 법에 저촉은 되는데 이미 진행된 사항이라며 넘어갔잖아요? 못된 짓을 했어도, 기정사실화해놓고 봐주는 식으로 가는 것이 문제지요. 항상 우리는 처음을 잘 봐야 해요. 운하를 하려고 했다거니 안 했다거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환경영향평가 등 절차를 어떻게 그렇게 맘대로 뭉갤 수 있었는지부터 따져야 해. 강이라는 것은 인생처럼 구불구불해서 내려가는 것이야. 직선화하면 어쩌겠다는 것이여. 이미 만든 보, 멋있게 보이니 그냥 두자고 할 일이 아니지. 보 아래 생명의 파괴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지.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

-정치적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 돼 있잖아. 그런데 공화라는 것을 너무나 몰라. 민주만 알지. 민주는 표로만 결정되는 것이지만, 공화는 어떤 모습으로든 참여하는 모습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모든 분야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골고루 듣고 새길 줄 알아야지요. 다양한 의견들을 잘 끌어내서 정리하고 수용할 것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 공화의 의미지요. 엠비 정권 때 공화의 싹을 잘랐는데, 박근혜 대통령도 미래창조라는 것 내세우고 뒤에선 과거로 돌아가는 인상을 풍기면서 실망을 주고 있어요.”

거실 책상엔 영어 성서와 영어 신문이 놓여 있었다. “사방에다 책을 둬. 치매 오면 안 되잖아.” 점심을 먹고선 아파트 뒤 봉화산에 오른다. “여한이 없는 나이지. 개인으로 보면 훌륭하게 잘 살았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의 정의 안에 살고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순천/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정규완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은퇴 뒤에도 용산·4대강 등 ‘쓴소리 신부님’

정규완(74) 신부의 꿈은 의사였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한 그는 1958년 전남대 의대에 입학했다. “돈벌이 의사가 아니고 봉사하는 의사”를 꿈꿨다. 고교 3학년 때 세례(토마스 아퀴나스)를 받은 뒤 “신앙이 의사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굳어지며 61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67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신부로 서품돼 2003년 9월까지 주임신부로 재임했다.

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설립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태동 때부터 참여했고,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을 지냈다.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진압 때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가 군 영창에 갇혔다.

2003년 9월 은퇴 뒤에도 서울 용산참사와 4대강 사업 등에 강론과 선언 동참 등으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2010년엔 정진석 추기경의 4대강 개발 두둔 발언을 질타하는 성명에도 동참했다.

정 신부는 은퇴 이후 전남 순천 아파트에 머물며 향심기도 수련에 정진하고 있다. 2009년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라는 책을 냈다.

광주/정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