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스크랩] [4월5일]

"/" 2013. 4. 5. 07:51

빈첸시오 페레리오 (Vincent Ferrer)   [4월5일]
연 도 : 1350-1419년
신 분 : 신부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태생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또는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귀족인 빌리암 페레리우스와 콘스탄스 미구엘의 아들로 태어났고, 1367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갔으며, 불과 20세의 나이로 레리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의 설교가 뛰어났는데, 유대인과 모슬렘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78년부터 서방교회를 진동시킨 교황 논쟁에서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Avignon)으로 가서 루나의 베드로(Petrus, 베네딕투스 13세) 추기경을 적극 지원하고 그의 고문 겸 고해신부가 되었다. 1399년 빈첸시오는 아비뇽을 떠나 10여 년 동안이나 프랑스, 에스파냐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큰 감명을 받았고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지어 나왔다고 한다.

이즈음에 그는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프란치스코를 대동하신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욱 설교에 열심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개종자 가운데에는 시에나(Siena)의 베르나디네와 사보이아(Savoia)의 마르가리타(Margarita)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그 나라말을 모르는 지역에서도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또 이에 따르는 수많은 기적들 때문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1416년 그는 아라곤(Aragun)의 페르디난도 왕처럼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황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 빈첸시오는 사망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던 중 브르타뉴(Bretagne)의 반(Vannes)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가타리나 토마스(Catherine Thomas)   [4월5일]
연 도 : +1574년
신 분 : 동정녀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Catharina Thomas, 또는 가타리나)는 일생동안 에스파냐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Mallorca) 섬에서 지냈다. 그녀의 양친은 막내딸인 카타리나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모두 운명하여 어려서부터 슬픈 나날을 보내며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소량이지만 약물 상용 복용자였다. 이를 극복하라고 주위에서 야단이었지만 그녀는 이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그녀는 성 안토니우스(Antonius)와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이 치솟았고, 이 사실을 은수자로 지내던 안토니우스 카스타네다 신부에게 말씀드리고 판단을 기다렸다. 얼마 후에 그녀의 성소를 시험한 안토니우스 신부는 이를 허락하고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팔마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를 선택하고 입회하였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입회 초부터 그녀의 탁월한 성덕과 겸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돋보이기 시작하여 장상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간 13-15일 동안은 탈혼 상태에서 지냈으며,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그런 상태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때때로 간경증 환자처럼 전혀 생기 없는 상태가 되었고, 또 예언의 은사도 받았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녀원 내에서 맡은 소임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는 자신이 예언한 해(41세)에 운명하였으며, 1792년에 시복되고, 1930년에 시성되었다.


알베르토(Albert)   [4월5일]
연 도 : +1127년
신 분 : 성인,주교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Puglia)의 몬테코르비노 사람인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그곳의 주교가 공석이었을 때 주민들에 의하여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 후 한때 시력을 상실하여 고생하였으나, 어떤 환시를 본 뒤로 오히려 제2의 시력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혜까지 입었다. 한 번은 그가 수하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한다. 성 알베르투스 만큼 전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주교는 여태껏 없었다고 한다.

에텔부르가(Ethelburga)   [4월5일]
연 도 : +647년
신 분 : 성녀,수녀원장

켄트(Kent)의 왕이며 캔터베리(Canterbury)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 의해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했던 성왕 에텔베르트(Ethelbert)의 딸인 성녀 에텔부르가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외교인 왕 성 에드윈(Edwin)과 결혼하였다. 그녀와 그녀의 전속사제 바울리누스(Paulinus)는 국왕을 설득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국왕 성 에드윈은 국내에 그리스도교의 증가를 권장하였으나, 633년에 왕이 죽자 이교도들의 여러 종교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이 때문에 에텔부르가와 바울리누스는 켄트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그녀는 리밍게에 수도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그곳의 원장으로 살았다.

율리아나(Juliana)   [4월5일]
연 도 : 1192-1258년
신 분 : 복녀,신비가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리에주(Liege) 교외 러틴느에서 태어난 율리아나는 5세 때에 고아가 되어 코르닐롱 산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이 없다고 지적하셨다. 그 후 그녀는 수녀가 되었고, 1225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저런 오해도 많았고 제재를 당하였으나 마침내 리에주의 주교가 1246년 교구 내에 ‘주님의 성체 축일’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그 주교가 사망하면서부터 그녀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율리아나는 자기 수녀원에서 쫓겨났다. 그 후 나무르(Namur)의 시토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하였으나 그곳마저 헨리 2세의 군인들이 파괴하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성체 축일 제정과 그 축일의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이레네(Irene)   [4월5일]
연 도 : +304년
신 분 : 성녀,동정순교자

성녀 아가페(Agape)와 그녀의 동생 성녀 키오니아(Chionia)와 이레네는 마케도니아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신자였는데, 이들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성서 소지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가지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의 둘케티우스(Dulcetius) 총독 앞에 끌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이교의 신에게 바친 희생물을 먹으라는 고문을 물리치고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로써 아가페와 키오니아는 화형에 처해졌으나, 총독은 이레네를 살려두고 다시금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레네가 끝내 굽히지 않자 총독은 그녀를 매음굴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여기서 그녀의 옷이 벗겨지고 매음을 강요당하였을 때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총독은 사형을 언도하였다. 화형에 처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녀의 목에 화살을 쏘았다는 전설도 있다.

제노(Zeno)   [4월5일]
연 도 : +연대미상
신 분 : 성인,순교자

성 제노가 언제 어디서 순교했는지는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산 채로 불태워졌다고 한다.

제랄도(Gerald)   [4월5일]
연 도 : +1095년
신 분 : 성인,수도원장

성 게랄두스(Geraldus, 또는 제랄도)의 출생지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y)의 코르비(Corbie)이며, 그는 이곳에 있는 대수도원의 첫 번째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늘 고생하였는데, 이 신경통이 일생동안 그를 괴롭혔다. 어찌나 심했던지 어느 날 밤에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또 이성을 잃을 때도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원장은 그를 로마(Rome)에 보내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사도들의 무덤을 참배하면서 차츰 차츰 병이 나아갔다. 이리하여 그는 성 레오 9세(Leo IX) 교황의 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고행에만 전념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았다.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시어 그에게 다가 오는 환시를 보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였다. 그는 이 순례에서 돌아와서 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수도원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는데 헌신하는 한편 새 수도원을 여러 곳에 세웠다. 1079년 소브 마외르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된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였다.

그는 회원이 사망하면 그 영혼을 위해 30일 동안 미사를 봉헌토록 하였고, 또 그 영혼을 위하여 일 년 동안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다. 후일 이 규정은 완화되었지만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아름다운 풍습이 되어 전해온다. 그는 1197년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 또는 첼레스티누스)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크레센시아(Crescentia)   [4월5일]
연 도 : +1744년
신 분 : 복녀,동정녀

크레스켄티아(또는 크레센시아)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의 카우프베렌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매우 열심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단순성의 표양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자녀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자주 성당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다. 크레스켄티아는 집주위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녀회 성당으로 자주 성체조배를 하러 다녔는데, 어느 날 그녀는 십자가로부터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이 네가 거처할 집이니라.”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께 간청하여 수녀원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집안이 너무 어려우니 21세까지만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고 열심히 가사를 도왔다.

드디어 이 약속은 지켜졌다. 그녀의 수녀원 생활은 겸손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참금을 전혀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주 조그마한 방이 마련되었으나 지참금을 지불한 새 입회자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자신은 그녀의 방 마루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수모를 아주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높은 성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상이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녀의 높은 덕을 보고 살아있는 성녀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수련장과 원장직까지 역임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환시를 보았고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 많았다. 이 체험은 매주 금요일마다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녀의 영향은 수녀회 뿐만 아니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참 지혜와 겸손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고 돌아갔으며, 교회의 지도자들도 가난한 이 수녀의 의견을 듣고자 애썼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일어나 아버지께
글쓴이 : 안개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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